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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전주대신문 제934호 10면, 업로드일: 2023년 10월 25일(수)] 겨자씨 장선철 교수(前 상담심리학과)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寒露)를 지내고 나니 어느새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절기가 다가온다. 제법 조석 기운이 선득하여 나무들은 겨울맞이 준비를 한다. 녹색 잎들이 서서히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며 가을 산의 정취를 자아내기 시작한다. ‘풀꽃’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나태주 시인의 글이다. “아무리 멈칫거리는 가을이라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아침저녁으로 어느새 바람 시원하고 열어놓은 유리 창문으로 유난히 새하얀 구름 높이 높이 솟아오른다.” ▼ 계절은 이렇듯 어김없이 하나님의 시간을 따른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 녹아들어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오는 봄을 기다리며 안으로 새로운 생명을 키운다.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참 만남으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우리의 전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따스함이 우리의 마음 깊이 깃들어 있던 이기심과 열등감 그리고 두려움과 증오심이라는 얼음을 녹인다.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이란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사랑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깨닫는다. 봄이 오면 눈석임물이 흘러내려 새로운 생명을 깨우듯 주님의 은혜로 영생을 맛본다. 사도 요한은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뜻한다. 친밀한 사귐은 ‘자기애라는 감옥’에서 나와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잃어버렸기에 모두들 ‘자기애라는 감옥‘에 갇혔다. 이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기적에 감응하지 못하고 오로지 권력과 금력에 따라 서로를 저주하며 조롱하는 말들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 10월, 익어가는 가을을 맞아 이제는 모두 하나님의 시간을 영접해야 하지 않을까. 버려야 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안으로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순간이 아닌 영원함, 영생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아멘. * 인용 가능(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
2023-10-24
234
세상들의 평화
[전주대신문 제934호 11면, 업로드일: 2023년 10월 25일(수) 세상들의 평화 한병수 목사 (선교신학대학원장·선교신학대학원 신학과 교수) 세상에는 많은 세상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세상에서 산다. 각자가 가진 기준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도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같은 지구를 디디며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시간에 머물지만 생각이 다르면 모든 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지구촌 안에서도 그 수많은 세상의 조화와 공존과 상생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각자가 타인의 세상을 짓밟으며 자신의 세상을 한없이 넓히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과 관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상을 확대한다. 여기에는 옳고그름 문제가 발생한다. 그 맥락에서 자신은 옳고 타인은 틀렸다는 이분법이 곳곳에서 활개친다. 입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 상대방의 입장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 때로는 흉기를 사용하고, 때로는 속임수를 사용하고, 때로는 편 만들기와 줄 세우기에 돌입하여 쪽수로 승부한다. 자신의 기준과 관점에 대한 집착들의 충돌 때문에 사람들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공통의 규범 즉 법을 만들었다. 법은 타인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와 개별적인 세상의 적정한 확장을 허용하는 합의된 규정이다. 동시에 법의 존재는 개인과 개인의 갈등을 당사자가 스스로는 해소하지 못한다는 일종의 반증이다. 물론 법은 문명의 발전을 보여주는 첨병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을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발한다. 법만이 아니라 법원의 존재도 유사한 것을 고발한다. 인간은 합의된 법이 있더라도 존중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법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의 기준과 관점을 따라 사회법을 해석한다. 이런 주관적인 해석들은 충돌한다. 그러면 그 해석들은 재판정에 선다. 재판관은 무엇이 옳은 해석인지 결정한다. 재판관의 존재는 법의 해석들이 올바르지 않다는 전제를 드러낸다. 대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이 내려진 사안에 대해서도 불복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그때 판결을 집행하는 경찰의 공적인 무력이 동원된다. 경찰의 존재도 사회법에 근거한 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조차 거부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등을 드러낸다. 법의 존재만이 아니라 집에 울타리가 있다는 것, 그것이 불안해서 문이 있다는 것, 문으로는 불안해서 자물쇠가 있다는 것,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아서 CCTV가 있다는 것도 보안의 발달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소유를 탐하고 훔치는 인간의 도둑놈 심보를 고발하고 있다. 거래할 때 구두로 계약하는 것이 부족하여 계약서를 쓰고 그것도 부족하여 도장이나 자필 서명을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공증인이 필요한 것도 거래 문화의 발달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인간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존재라는 사실도 드러낸다. 사람의 지식이 가시광선과 가청주파수의 세계를 넘어 극미시 세계와 극거시 세계를 출입할 정도로 과학과 기술은 발달했다. 그러나 그것이 신기하고 놀랍지만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것보다 해를 끼치는 부작용이 크다. 식품만 보더라도 유전자를 조작한 것보다 친환경 유기농 농산물을 더 선호한다. 인위적인 조작보다 있는 그대로가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의 유구한 손때가 묻은 문명의 발달이 주는 유익은 대단하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의 발달을 예찬하는 동시에 발달의 배후에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인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기준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삶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정상일까? 기독교는 그런 현실을 비정상과 무질서로 이해한다. 각자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그래서 공동체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배후에는 인간의 본성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해석한다.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을 왕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그런 왕이고자 한다. 자아를 찾아가고,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개발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기호의 끝에 왕이고자 하는 기대감이 있다. 자신이 왕이 된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을 확장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싸워야 함을 명심하자. * 인용 가능(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
2023-10-24
282
[쉽게 읽는 성경] 땅을 위한 소금, 세상을 위한 빛
[전주대신문 제934호 11면, 업로드일: 2023년 10월 25일(수)] <쉽게 읽는 성경> ⑧ 땅을 위한 소금, 세상을 위한 빛 조재천 교수 (선교신학대학원) 예수의 가르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산상수훈의 첫머리에는 이른바 ‘복 선언’(the Beatitudes)이 나온다. 여덟 가지 혹은 아홉 가지 복의 선언은 논증적이라기보다 시적이고 예언적이다. 지금 이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거칠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런 제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예수는 십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종말에 ‘하늘’에서 지금 겪는 모든 아픔이 환희와 풍성함으로 보상되리라고 약속한다. 복 선언(5:1-12)이 교향곡의 서곡이라면,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빛과 소금’ 말씀(5:13-16)은 교향곡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 선율이라 할 수 있다. 5장 17절부터 7장 12절까지 제시될 다양한 윤리적 삶의 원리와 실천 방안의 저변을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이 말씀이다. 따라서 제자도 혹은 제자의 정체성에 관한 이 두 가지 은유적 선언(“너희는 ~이다”)을 너무 구체적이고 특정한 규범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이 놓인 문맥을 염두에 두고, 많은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두 말씀은 대구를 이룬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두 가르침이 아니다. 서로 비슷하거나 대조를 이루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다. ‘빛과 소금’이라는 우리말 관용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예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첫 번째 말씀이 두 번째 말씀(“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보다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데, 더 짧고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땅의”라는 속격 명사는 바로 앞 12절 “하늘에서”와 대조를 이룬다. 평화와 기쁨, 위로와 풍성함이 있는 ‘하늘’과 달리, 결핍과 고통, 박해와 외로움이 있는 곳, 그곳이 ‘땅’이다. 이 척박한 땅에, 그리고 이 땅을 위해서 제자는 소금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땅에서 소금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주석가들의 제안은 많고 다양하다. 부패를 막는 방부제, 맛을 내는 조미료(욥 6:6), 희생제물에 뿌려지는 거룩한 헌신(레 2:13), 변하지 않는 언약의 상징(민 18:19), 거룩함의 상징(출 30:35), 인간 생존의 필수품(집회서 39:26), 왕이 내리는 급여를 받는 신하의 충성심(에 4:14), 평화(막 9:50), 적절한 언어(골 4:5), 현자들의 지혜 등. 이것들 중 꼭 하나만 집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앞서 1-12절에 복의 조건으로 언급된 몇 가지 요소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마음의 깨끗함’(8절), ‘평화를 만드는 일’(9절), 혹은 ‘의를 위해 받는 박해’(10절) 등을 뜻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보다 세상에 필요한 존재, 세상을 섬기고 유익하게 하는 존재로서 다양한 역할이 ‘소금’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낫다. 마르틴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소금은 소금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은 더 난해하다. 땅의 소금, 땅을 위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그것을 다시 짜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증발을 통해서 얻어지거나 사해 인근에서 채취된 암염을 통해 얻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채취된 소금은 애초에 염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또 소금을 보관하면서 다른 물질이나 불순물들과 섞이기도 했다. 즉, 현실적으로 소금의 염도가 아주 낮아져서 쓸모없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 그런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흔했는지와는 별개로, 이 말씀을 비유로 이해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예수는 여기서 제자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그에게 기대된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경고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됨의 진면목은 예배당이나 자신만의 홀로 있는 시간에만 나타나서는 안 된다. 땅의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제자는 소금처럼 행동해야 한다. 또한 이 구절의 비유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그리스어 원문이 도움이 된다. ‘짠맛을 잃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모라이노”의 어원적 의미는 ‘어리석게 되다, 둔해지다’이다. 그렇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이란, 예수의 제자인데도 아닌 척, 모호하고 어중간한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제자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제자가 맞이할 운명, ‘밖으로 던져짐’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분리되는 엄중한 심판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선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의 의미는 첫 번째 선언의 빛 아래에서 찾아져야 한다.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한다”,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은 예수를 믿는 신앙이 자기만족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와 이웃, 세상과 문화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땅의 소금이 땅을 위한 소금이듯이, 세상의 빛도 세상을 위한 빛이어야 한다. 16절에 의하면 ‘빛’은 ‘선한 행실’을 가리킨다. 무엇이 선한 행실인지는 각 사람의 처한 상황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단, 사람들이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로 명확하게 복음적이고 일관된 행실일 것이다.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사람들이 그것을 순수한 신앙적 동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누군가를 전도할 목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일은 그 자체로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어떤 전략이나 방책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녹아든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삶의 내용이다. 소금과 빛으로서 제자의 정체성은 어쩌면 전주대학교와 같은 기독교 대학 내에서 기독교수, 기독학생으로서 우리의 모습에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라는 한 초대 교회의 문서에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몸 안에 영혼이 존재하듯,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존재해야 한다.” * 인용 가능(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
20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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